배신과 조롱과 의심을 넘어
눅 22:54~22:71
인생을 돌아보면 특별히 좋았던 순간이 있고 유독 괴로운 기억이 있습니다.
원하던 염원이 이뤄진 날, 결혼식을 올린 날, 자녀가 태어난 날. 가장 행복했던 날, 완벽에 가깝게 평안했던 순간들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이와 반대로 가장 괴롭고 끔찍했던 날도 없지 않았습니다. 떠올리기도 싫은 날, 인생 전체를 지배할만큼 괴로웠던 순간, 할 수만 있다면 되돌리고 싶은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베드로에겐 오늘 본문이 그런 순간 아니었을까요.
베드로에게도 예수님과 동고동락한 3년 중 다양한 순간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처음 예수님을 만나 자신을 불러주셨던 기억, 사람을 위한 어부로 불러주셨던 기억. 예수님을 따라 바다 위로 발을 내딛었던 기억, 예수님의 기적을 눈앞에서 목도한 기억, 변화산에 따라 올라 영광을 보았던 기억.. 그런 감격스럽고 신나는 순간의 정반대에는 오늘 본문처럼 예수님과 눈이 마주칠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세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저주했던 가장 괴로운 순간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세번째 예수를 모른다 부인했을 때 마주친 예수님의 눈동자는 무엇을 말하고 있었을까요. 분노로 이글이글 타오르지 않았을 것이고, 매맞은 고통과 수치로 맥없이 풀려있지도 않았었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전에 이미 말했듯 나는 너의 부인함을 이미 알고 있었단다" 하시며 십자가에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주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고 있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하셨듯 긍휼함이 담긴 눈동자였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이 완전히 만신창이가 된 베드로를 어떻게 다시 부르시는지, 베드로의 사랑을 회복시키시는지, 베드로를 어떻게 사명자로 인치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베드로가 담대한 예수님의 전도자가 되어 예수님의 사랑을 전파했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과거와 현재에서 예수님을 부인함이, 예수님의 시선을 회피하여 멀리 도망쳤던 순간들이 예수님의 부활 안에서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거듭나고 조금씩 예수님을 닮은 인생으로 변화됨을 믿습니다.
예수님. 오늘도 저희의 하루는 예수님을 향한 무수한 크고 작은 배신들로 점철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이 저의 연약함보다 크고, 예수님의 사명자로 부르심이 마침내 이뤄질 것을 믿습니다. 고아같은 저희를 불러 예수님의 왕같은 자녀로 부르셨음을 믿사오니 오늘 하루도 배신의 하루가 아니라 사명자로의 하루로 사용되도록 인도하여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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