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나눔

제목묵상깜지: 말씀과 성도와 교회와의 동행 (마 5:3-20, 목금 연결)2023-01-27 08:15
작성자

I. Prologue

목요일 0시 25분 인천에서 출국하여 금요일 새벽(국내 시간) 4시 15분에 두번째  경유지 상파올로에 도착했습니다.


먼저 양해를 구하고 싶은 점은 형제자매님들을 위한 나눔이 아니라 제가 정리되기 위한 작문이 되어부렀습니다. 분량이나 이야기의 흐름이 독자친화적이지 못하더라도 예수님과 함께 깜지 쓰면서 복된 시간 보내는구나라고 생각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비행시간을 Quiet Time으로 활용하기에도, 오늘 묵상 내용을 이해하기에도 좋을 듯하여, 목요일 묵상 본문과 연결하여 작성했습니다.


II-1. 팔복

신앙을 시작한지 두 번째 해를 맞아 작성하던 제 기도 노트에는 팔복을 이렇게 정리를 했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욕구불만

애통한 자: 우울증

온유한 자: 호구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참견충

긍휼히 여기는 자: 찐따

마음이 청결한 자: 결벽증

화평하게 하는 자: 오지랖퍼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 관종


이렇게 정리하고 이게 왜 어떻게 복이냐고 따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예수님 공생애 당시에도 저런 특징은 주변 시선이 곱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각각에 복이 있다 말씀하십니다. 제가 부정적인 표현으로 정리를 해서 그렇지 가~~끔 어쩔 때는 이런 모습들이 성자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회부적응자의 모습으로 보일 때가 솔직히 많습니다.


세상의 시선 보다 주님의 평가와 명령이 중요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행동보다는 예수님의 목적과 방법을 함께 해야합니다. 성전에서 장사꾼에게 채찍질하며 진노하신 예수님의 방법만이 아닌 내가 탈진했을 때 손 내미신 주님의 방법, 예수님의 성품을 매우 닮은 듯한 교회 형제자매의 행동양식을 더 참고해야 합니다. 즉, 팔복에 해당되는 심리적 상태나 행동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심리나 행동으로 인해 예수님께 위로와 지도를 받는 동행의 과정으로 하나님 아버지 나라까지 가는 것이 목표이어야 합니다.


II-2. 우울했던 초신자에게 내려진 복

지금도 그렇지만 2년전 신앙생활 초기에는 눈물이 더 많았습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찬양하다 기도하다 매우 높은 확률로 웬만한 상주들만큼 서럽게 울었습니다. 울다 보면 나이 먹고 남자가 사람들 많은 곳에서 부끄럽게 왜 이렇게 울고 있나 서러워져 더 울었습니다. 저 노트를 작성하던 당시에도 제 울음을 우울증으로 여기고 계속 고쳐달라고 하던 중 마주친 말씀이라 항의하려고 적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던 중 예배시간에 강단에서 이런 내용이 선포되었습니다.

"개미가 코끼리 위에 올라타서 이걸 콱 밟아 죽여? 했다는 농담 알지? 너가 개미고 말씀이 코끼리야, 체급 차이가 어마어마하게 더 나는. 말씀이 역사하시려는데 반항하지마!"

제가 공부를 썩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못하지도 않았기에 나름 받아들여졌습니다. 이해의 영역을 넘어 수용될 수도 있겠구나.

그리고 또 다시 울음이 터졌을 때 주님께 고백 되어졌습니다. "(복 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이 운동하고 역사하시는 경험 후에는 울음과 눈물이 고민거리나 문제거리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왜 아무런 일도 아니었던 걸 그리 오래 문제 삼고 괴로워했나 허탈하기까지 했습니다.



III. 빛과 소금

오늘 본문의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는 명령도 팔복과 마찬가지로 주님과의 동행이라는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신대륙의 원주민을 이교도로 학살하고 노예로 사용했던 기독교 국가 개척자들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개척지 농장의 성당 지하에서는 흑인노예를 성적으로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정도가 다를 뿐 저도 자주 범하는 실수지만, 자신이 편집하고 제단한 예수님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고 주님을 위해 내가 수고했다 자찬합니다.


원주민을 핍박하여 부강하게 된 일부 개척국들을 하나님이 왜 아직도 윤택하게 살게 두시는지 저는 아직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그 핍박을 받던 인종들이 예수를 주로 받아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약탈국의 경제적 윤택함은 짧은 인간의 역사 가운데 잠깐의 시간일지도 모릅니다. 또는 침략국은 경제적 여유를 얻은 대신 예수를 잃었을 수도 있습니다. 대략 짐작하기에는 다양한 신앙의 모습이 의의 병기로 혹은 불의의 병기로도 사용될 수 있지만 주님은 언젠가는 갚으시는 것 같습니다.



IV. 율법의 예외?

얼마 전 영화 "뮤지컬 영웅"을 봤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는 이토를 사살한 아들 안중근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합니다.

"한국에게는 악인이었을지라도 일본의 위인을 죽였으면 목숨을 구걸치 말고 한국의 장수로서 당당히 처벌을 받아라. 어미보다 늦게 죽는 것이 효도가 아니라 조국의 명예를 높이는 일이 어미에게 하는 효도다."


안중근 의사는 주권을 잃은 국가의 저항군 장수였으므로, 테러리스트이자 살인자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아무리 선한 일이라도 그런 선을 비난하고 폄하하는 사람도 있고, 무관심한 사람도 있으며, 본의 아니게 상처 입는 사람이 생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V. 율법의 의?

논란의 여지가 크고 많은 주제인 "성소수자"를 언급해 보겠습니다. 나는 성소수자가 아니므로 의롭다 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외모의 동성을 보더라도 요동치 않음이 내가 의로워서가 아닙니다. 뛰어나지 못한 외모의 이성에게도 마음이 설랜다 하더라도 제가 동성애자가 아니라는 의를 드러낼 수 없습니다. 술을 싫어해서 취하지 말라는 율법을 지키기 쉬운 저는 주님이 저를 지켜주셨다 생각할 뿐 취하지 말라는 율법을 잘 지키는 의로운 성도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치와 같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성소수자들을 믿음의 공동체로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대답을 망설일 수 밖에 없습니다. 현재의 저로서는 그 망설임의 순간을 기도와 협의와 준비의 타이밍으로 잡아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기도와 순종으로 능력을 받아 행하면 능치 못함이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제 자신의 기준과 판단이 주님과 교회 보다 앞서진 않은지 신중히 판단해야 합니다.


나와 우리가 준비가 되어 있는지, 그들을 위해 우리가 최선인지 함께 기도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극단적인 예를 들었지만 이주민이나 극빈가정, 장애인 등 일반적이지는 않지만 예수님이 많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는 그리고 우리는 얼마나 준비가 되어 있는지 점검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당장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어떻게 그들과 교제를 이어가며 복음을 전파할 수 있을지, 그런 경험이 많은 전문가나 조력자는 누구인지도 알아보겠습니다.



VI. 동행

성경을 경전으로 삼은 세계 주요 종교만 하더라도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카톨릭, 개신)교가 있습니다. 국내의 개신교 교파만 하더라도 수백을 가볍게 넘습니다. 심지어 국내 교회의 수는 편의점 수 보다 많다고 합니다. 이런 어마어마한 다양성 안에서 우리 나무가, 우리 교회가 예수님께 기적처럼 이끌려 모여 함께 지어져 갑니다. 다른 교회나 성당이 틀리고 우리가 옳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모아 이루실 일이 기대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다양한 관점이 있고, 저의 해석과 행함이 조금은 별난 구석이 있더라도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여러 지체와 함께 협력하여 선을 이룰 때야 말로 머리 되신 주님을 기쁘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01054481770
댓글
자동등록방지
(자동등록방지 숫자를 입력해 주세요)